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테오도시우스의 이교 박해 (문단 편집) == 전개 == 389년, 테오도시우스는 여전히 기독교화되지 않은 이교도들의 축일은 축일로 인정받을 수 없으니 근무일로 삼겠다는 내용의 칙령을 반포했다. 391년에는 피를 바치는 제사의 금지를 재차 강조하며 "아무도 성소에 가거나, 사원을 거닐거나, 인간의 노동으로 만들어진 조각상을 경배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또한 테오도시우스의 보호를 받고 있던 서방의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391년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의 조언에 따라 이교도 사원들을 폐쇄하라는 칙령을 내렸고, 그라티아누스가 파괴했던 승리의 제단을 복원해달라는 [[원로원]]의 요청을 거부했다. 한편,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변 일대를 관장하던 마테르누스 시네기우스 총독은 군인들을 동원해 그 일대의 사원들을 파괴하거나 폐쇄했다. 아파메아의 총독 마르켈루스는 이를 본받아 아파메아 시의 제우스 사원을 철저히 파괴했다. 이것은 사원들을 공공 장소로서 보존하라는 황제의 명령에 반하는 행동이었지만, 테오도시우스는 그들을 처벌하거나 책임을 묻지 않았다. 이에 기독교도들은 이교도들을 공격해도 황제가 용인할 거라고 여기고 이교 성소, 신전들을 거침없이 공격했다. 특히 391년애 아이깁투스 속주의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에서 반 이교도 폭동이 일어나 여러 신전이 파괴되었으며, 세라피스 신을 모사한 흉상이 전부 파괴되고 그 자리에 십자가가 세워졌다. 392년, 테오도시우스는 모든 종류의 이교도 희생이나 숭배를 금지하는 법안을 발표했다. 그는 궁정 관리들과 치안관들이 불로 라레스(Lares)를, 포도주로 게니우스(Genius)를, 향으로 페나테스(Penates)를 경배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만약 사원에 들어간 자가 있다면, 초범일 경우 금 15파운드의 벌금을 지불해야 하고 지속적으로 위반할 경우 종교 재판에 회부했다. 여기에 모든 형태의 [[점성술]]을 금지했으며, [[마니교]]인들이 유언장을 작성하거나 유산을 얻을 권리를 박탈하고 그들을 잡는 즉시 재판을 통해 사형에 처하게 했다. 392년 5월 15일, 마기스테룸 밀리툼을 맡던 [[플라비우스 아르보가스트]]와 심한 갈등을 벌이던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돌연 사망했다. 아르보가스트는 그가 비엔나 별장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고 공표했지만, 대부분의 당대 기록은 아르보가스트가 직접 황제를 죽였거나 근위대를 매수해 시해하게 했다고 추정한다. 암브로시오는 장례식에서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추모하는 주례를 맡아 발렌티니아누스를 신앙심 깊은 기독교인의 전형으로 묘사하면서 천국으로 똑바로 올라갔다는 말을 남겼다. 기독교 교리상 자살이라는 죄악을 저지른 자는 천국으로 똑바로 올라가는 것이 불가능한 만큼, 이는 황제가 살해당했다는 공식적인 교회의 입장이었고 사실상 서로마의 실권자였던 아르보가스트에 반대한다는 의사표명을 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암브로시오와 아르보가스트와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아르보가스트는 일전에 자기를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보호자로 삼았던 테오도시우스 1세에게 인정받기 원했는지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사망한 후 3개월이 지나도록 새 황제를 세우지 않았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 1세에게 그럴 의사가 없다는 게 분명해지자, 아르보가스트는 반기를 들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직접 황위에 오르지 않고 친구 [[에우게니우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에우게니우스는 서기 392년 8월 22일 황위에 오른 뒤 테오도시우스가 임명했던 제국 내의 행정관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그 자리에 자신의 측근들을 선임했다. 다른 행정관직도 원로원 계급 출신 인사들이 임명되었다. [[비리우스 니코마쿠스 플라비아누스]]는 이탈리아 근위구장을 맡았고, 아들 니코마쿠스 플라비아누스는 로마 관구장을 맡았다. 에우게니우스는 명목상으로는 기독교도였으나, 실제로는 로마 다신교를 신봉했다고 한다. 그래서 [[로마 다신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원로원의 요청에 따라 지난날 [[그라티아누스]]에 의해 파괴되었던 승리의 제단을 복원했다. 또한 그가 임명한 이교도 행정관들의 설득을 받아들여 오스티아의 헤라클레스 신전을 재건했으며, 이교도들의 축제를 후원했고, 로마의 베누스 신전의 재헌정을 이끌었다. 이에 테오도시우스는 에우게니우스를 타도하여 기독교를 구하기로 마음먹고, 394년 서방 원정을 단행해 [[프리기두스 전투]]에서 아르보가스트와 에우게니우스를 처단하고 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되었다. 내전에서 승리한 뒤 로마에 입성한 테오도시우스는 원로원을 소집한 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것인지, [[유피테르]]를 모실 것인지 양자택일하라"고 명령했다. 의원들은 감히 황제의 뜻에 거역하지 못하고 "폐하의 뜻에 따르겠다"라고 화답했다. 그리하여 이교도 의식의 공적 수행을 위해 적립되었던 모든 국가 기금이 회수되었고, 다시는 이교도 의식의 공공 행사나 이교도 사원의 유지 보수를 위해 국고를 쓰지 않는다는 법안을 발표했다. 일설에 따르면, 이 법안이 통과된 날 의원 한 명이 자택에서 단검으로 목을 그어 자살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